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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사운드트랙

간첩을 뒤쫓던 '영등포의 밤'

'영등포의 밤' 부른 원로 가수 오기택 선생

간첩 용의자를 뒤쫓던 두 고교생

내 친구 남인은 학창시절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1968년 여름방학 직전 서울 남산야외음악당 앞 광장에서 서울 시내의 모든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반공과 관련된 궐기대회 도중 무대 위로 뛰어올라 혈서를 써서 수만 명의 관중들을 놀라게 만든 전력이 있다. 그 모습은 나중에 TV 뉴스시간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 혈서사건이 일어나기 몇달 전 어느 비오는 날 저녁이었다. 영등포시장 앞 거리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점점 어두워지고 있던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남인과 나는 우산을 쓴 채 귀가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남인은 근처의 영등포동으로, 나는 문래동으로 귀가하기 위해 당산동 방향 건널목 앞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우리 둘이 건널목으로 내려서는 순간 옆에서 걷던 남인이 앞을 가리키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광인아. 저 앞에 가는 저 사람 아무래도 수상해. 간첩이 아닐까?"

남인이 가리키는 앞쪽을 바라보니 중절모를 쓴 한 남자가 우산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남루해 보이는 외투를 입은 그 남자의 모습은 정말 수상해 보였다.

그 남자는 건널목을 건너기 무섭게 우산을 쓰고 천천히 가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주 잰 걸음으로 달려가듯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쫓아가자!"

우리 둘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소리치듯 말하고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우리는 헐떡거리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저 멀리 그 수상한 남자의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때 근처의 레코드 가게에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내 가슴에 안겨오던 사랑의 불길/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아 아 ~아 아아~ 영원히 잊지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오기택이 부른 '영등포의 밤'이었다. 우리 둘은 숨 돌릴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앞에 가는 수상한 남자를 뒤쫓고 있었다. 그 남자는 우리가 자신의 뒤를 쫓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점점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들려오던 노래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 어린 영등포의 밤/영원 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꽃~."

남인과 나는 어떻게 하겠다는 아무 대책도 없이 무조건 그 남자를 뒤쫓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행인들은 점점 줄어들고, 주위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저 멀리 안양천 제방이 어렴풋이 보였고, 남자는 제방 아래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 사이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곳은 가로등도 없는 곳이었다. 그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우리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실소를 멈출 수 없었다. 간첩으로 보이는 용의자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으니 더 이상 쫓아갈 수도 없고, 어디에 신고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노래의 가사처럼 궂은 비만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영등포시장 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몇달 후 남인이 혈서를 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둘 모두 새카맣게 모르던 영등포의 밤이었다.

 그리고 30년 후 그 노래의 주인공 오기택 선생과 내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될 줄은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분이 하루 빨리 건강을 되찾았으면 정말 좋겠다.

https://youtu.be/avLpWSgGWgc